일산 호수공원 :: 2007/05/26 21:42

  이거 쓰는데 옆에서 혜갱이 "와 길다" 하고 놀랜다. 길게 쓸 생각 없었는데 쓰다 보니 길어졌네. 게으름이지. 요약해서 쓸 생각 안하고 그냥 머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끄적대는. 대구에 와서 혜갱 컴터 쓰는 것도 오랜만이다. 매스컴은 대구를 '사고 많이 나는 곳'으로 인식하지만 난 막상 자주 와서 그런지 편하고 서울보다 살기 좋은 거 같고 대구 지하철도 아무 생각 없이 잘 타고 다닌다. 울 아빠 말처럼 위성도시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인내심이 많은 거 같다. 아빤 여수에서 순천으로 출퇴근하는데도 30분밖에 안 걸리는데 난 학교까지 걸어가면 30분 걸린다. 일산 가려먼 40분 걸리고 분당 가려면 2시간 걸린다. '길바닥에 시간을 버린다'는 표현이 뭔지 서울에 와서 정확히 깨달았다.

  어제 저녁에 오늘은 어딜 갈까 고민했는데 별 생각이 안났다. 사실 피곤해서 생각하기가 귀찮았다... 그냥 일단 자고 내일 생각해보자 이래놓고 아침에 일어나니 열한시다. 여전히 느긋하게 뭐할까? 이러다가 서울숲과 일산호수공원 둘 중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혜갱의 선택이다. 난 서울숲은 별로 안끌리고 호수공원은 가봐서 호기심이 없고 그냥 호수랑 공원이랑 햇빛 보러 가야겠다 이런 단순모드로 이끌렸다.

  결론적으로, 느긋하게 출발한 대가를 톡톡히 치뤘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버스는 생각도 안해보고 아무 생각 없이 지하철을 탔다. 금방 갈 줄 알았는데 한시간 넘게 걸렸다. (학교 앞에서 1000번 빨간버스 타면 30분만에 바로 공원 앞에서 내릴 수 있는데 왜 그땐 그 생각이 안났을까.) 정발산역에서 1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공원이다. 기분이 묘했다. 저번에 왔을 때는 정원이랑 성연이랑 시루랑 등등 같이 왔었는데 그 때 가면서 탔던 버스가 사고나면서 뭐 버스회사에 보험사에 연락하고 어쩌고 하면서 좀 정신없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게 난다. 아마 그 날 일단 밥먹고 논 다음에 그 다음날 느지막히 병원 가서 검사를 했었다. 어떻게 오셨냐는 질문에 "교통사고 나서요" 대답했더니 "언제 다치셨어요"라고 묻길래 아무 생각 없이 "어제 아침에요"라고 말했었다.  사람들이 당황해 했다. 그 때는 이상한 줄 몰랐는데 대답해 놓고 나니 내가 생각해도 좀 어이없더라; 여튼 그때 보상금 받아놓고는 좋아라했던 기억도 나네. 그나저나 그 때 버스 타고 갔으면서 왜 오늘 아침엔 기억을 못했지? 이 단순함은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건가요...

  저번에 왔던 호수공원의 호수는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려는지 꽤 크고 둘레가 길어서 걷느라 지쳤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혜갱에게 '호수는 그냥 호수야' 이런 마인드로 좀 설득을 해보려 했는데 그녀는 호수에 대한 로망이 매우 강했다. 그래서 이번엔 도착하자마자 바로 자전거를 빌렸다. 너무 오랜만에 타서 좀 걱정했는데 자전거나 수영이나 스키나 한 번 몸에 익히면 괜찮나보다. 육교 넘어서 호수 있는 쪽으로 넘어가서 호수 주위를 돌면서 즐겼다. 천천히 도는데 소방훈련(?) 나온 초딩들이 귀여운 형광노랑 소방자켓을 입고 물 뿌리는 것도 보고 한쪽에서 사생대회랑 글짓기대회 하는 걸 보면서 그래 나도 어릴 때 저런 걸 했었어 하면서 추억하고 호숫가에 앉아 맑은 물에 물고기 한 마리가 노니는 걸 보고 맛있겠다며 동의하고 난 민물고기에 있는 기생충에 대해서 잠깐 말해주고( + 기생충실습때 봤던 껍질 벗긴 뱀과 아나고의 내장에 있던 흰색의 꾸물꾸물거리는 귀여운 기생충들에 대해서도 말해줬다)...
 
  그러다 풀밭에서 돗자리 깔고 소풍나온 수많은 가족+연인들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충동이 일었다. 우리도 풀밭에 누워서 노닥거리자! 그러나 우리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돗자리도 없고 먹을것도 없고 있는건 생수 하나.  둘이서 의기투합해서 자전거 끌고 공원 밖 도로로 나갔다(지리도 전혀 모르면서;;). 가다가 마침 라페스타 발견해서 충무김밥 사들고 돗자리 대신 신문지 마련하고 다시 공원으로 돌아가서 나무 밑 그늘에 누워 먹고 놀았다.  김밥은 좀(많이) 매웠지만 맛있었고 자리는 공원 입구 반대쪽이라 사람도 별로 없어서 자전거 한쪽에 세워놓고 편하게 누워서 눈감고 어른거리는 햇빛을 보면서 폰에 담아온 음악 들으면서 바람이 지나가는 걸 느꼈다...

  그렇게 평화롭게 게으름피우며 행복하게 노닥노닥노닥거리는데, 시간이 지나가는 줄 몰랐다. 정신 놓고 수다떨다가 아무 생각 없이 손목에 찬 시계를 쳐다보고 앗 이러면서 아쉬움을 접고 3시 50분쯤 일어났다. 서울역에서 대구 가는 KTX가 5시 15분 출발이라서. 정리하고 다시 공원 입구로 자전거타고 나가야지. 여기서부터 그 평화로움은 다 사라졌다... 호수 둘레는 생각보다 너무 넓었고 설상가상으로 길도 잃어버렸다 ㅜ_ㅠ 정말 있는 힘껏 자전거타고 헤매면서 입구를 찾았는데, 처음 왔던 곳에 도착해서 자전거 반납하고 나니 4시 15분이었다. 1시간 안에 서울역사 3층 개찰구로 가야 했다. 동반석 끊어놨는데 표가 우리한테 있어서 우리가 늦으면 4명 다 기차를 못타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버스타는 곳으로 막 뛰어가서 1000번 버스를 타고 나니 4시 20분. 금방 서울역 가겠지 싶어서 마음 좀 놓는데, 순간 혜갱이 생각해냈다. 우리 아까 올 때 정발산역 물품보관함에 가방 하나 두고 왔는데 안가져왔다;;; 아 이젠 놀랍지도 않다. 우리가 이렇지 뭐. 역무실에 전화해서 보관함 관리하는 사람한테 전화해서 해결봤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월욜에 다시 정발산역까지 가서 백원짜리 동전 24개 넣고 가방을 빼와서 택배로 부쳐줘야 한다는 거지. 그정도야 뭐.

  서울역에 도착한 버스. 역사 바로 앞에서 내려줄 거라 생각했는데, 역사를 지나쳐서 좌회전하더니 숭례문 쪽으로 간다. 맙소사. 남대문 시장 쪽에서 내려줬다. 5시 5분. 남대문시장에서 서울역사 3층까지 10분 안에 돌파하기. 태어나서 그렇게 미친듯이 뛴 적이 또 있을까. 내 생각엔 유럽 갔을 때 베니스에서 기차 놓칠까봐 뛴 적 빼고는 처음이다. 고등학교 때 오래달리기 할 때도 그정도는 안 뛰었다. 서울역 지하철역 지하가 그렇게 긴 줄 몰랐다. 1번 출구가 어찌나 멀던지;;; 개찰구 통과해서 기차 타고 1분도 안 지나서 기차가 출발했다. 아. 다시는 게으름피우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난  또 그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이젠 혜갱이나 나나 익숙해졌다. 어떻게든 해결될거야 하는 대책없는 믿음... 너무 뛰어서 처음엔 숨막힐 거 같더니 나중엔 목이 타는 거 같았다. 기차에서 내내 콜록거리니 혜갱이 옆에서 "노인들 기침하는 거 같아" 라고 했다. 너무하다. 그렇게 표현하다니. 정말 나이든 거 같잖아.

  평소같으면 기차 타자마자 습관처럼 잠들었을텐데 너무 뛰고 정신없고 흥분해서 그런지 1시간 40분 내내 눈뜨면서 음악 들으면서 왔다(그리고 가끔 콜록대면서). 동대구 도착해서 혜갱네 집에 가서 혜은이랑 어머니랑 오랜만에 보고 말로만 듣던 아저씨도 첨 만나고 맛있게 저녁먹고. 집에 와서 거실에 누워서 무한도전 보면서 정신없이 웃고. 고민 안하고 단순하게 사는 거 참 좋다. 문제는 단순함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동안 밀려뒀던 고민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한다는 거지만.

  내일은 외도 간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버스 안 놓치는게 관건이다. 나머지는 준비 끝. 일찍 자야지.

2007/05/26 21:42 2007/05/26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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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혜갱 | 2007/06/02 18:50 | PERMALINK | EDIT/DEL | REPLY

    단순함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동안 밀려뒀던 고민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한다는 거지만.

    완전동감이야.
    어제 저녁 제정신이 들고나서 제일먼저 한일은
    책상 치우기!
    그동안 농땡이 친 흔적이 역력했어. ㅋ
    부디 순탄히 트레블 메이트를 찾을 수 있기를...

  • 선영 | 2007/06/02 22:20 | PERMALINK | EDIT/DEL | REPLY

    나 아까 무심코 달력 보다가 깜짝 놀랬다. 벌써 6월 2일이라니 ㅜ_ㅠ
    남은 동안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건지, 아님 열심히 놀아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당
    아마 둘 다 해야 하는 거겠지?! <개강하기 전에 하고싶은거> 리스트 7개를 다 끝내고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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