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란극회 제 34회 정기공연『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 2005/11/15 18:05

< 8월 18일 수요일, 첫째날 공연 >

윈더미어 부인 분장 고치는 거 관찰하려고 맨 앞줄에서 봤다.
나는 아무리 말로 설명을 들어도 한 번 직접 봐줘야 이해가 간단 말야... 희진언니가 열심히 이야기해주셨는데 짐작이 안 가서...;; 하여간 결론은, 다음부턴 뒷자리에서 봐야겠다! 맨 앞줄에서 연극을 보니 정말 계속 긴장 초조해서 마치 유기 기말시험을 보는 것 같은 스릴-_-이 느껴진다. 옷자락에 커피잔이 쓸려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부채살이 또 부러진 걸 발견했을 때, 벽난로하고 책상 그림이 반쪽만 그려진 걸 봤을 때, 얼린 부인 옷자락이 탁자에서 빠져나오는 순간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ㅠ_ㅠ (이런거 대외비라서 말하면 안되는 건지도 모르지만... ㅋㄷ)

연습하는 걸 방학 내내-는 아니고 4일 동안-봐서 대사들이 익숙하기에 별로 안 웃기고 지루할 줄 알았다. (실제로 그저께 포켓 속에 있었을 땐 정말 좀 졸렸다...) 근데 이상하게 오늘은 너무너무 재밌었다. 긴장한 가운데서도 계속 웃고, 즐거워했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신기하게 웃는단 말야... (같이 웃은 난 뭐지?) 캐스트들이 하나하나 다들 너무 잘하는 거 같아서 안심되기도 하고, 마지막에 어린 마가렛이 울먹일 때 눈물 찡하고... 게다가 관객들 사이에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된 걸까. 얼린부인이 옷자락 걸린 거 무사히 빠져나왔을 때 모두들 이제 안심했다는 듯 긴 숨을 내쉬는 게 사방에서 들렸다ㅋ

연극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대충이나마 알게 된 다음부터, 연극을 볼 때 맘 편히 본 적이 별로 없는 거 같다. 혹시나 배우들이 실수하지 않을까, 소품이 망가지진 않을까, 괜시리 걱정된다. 게다가 내 눈에 익숙한 것만 보인다 ;; 오늘은 얼린 부인 옷자락이, 각종 악세사리들이, 캐스트들 분장이, 부채 두 개 남자 캐스트들 나비리본 머리장식들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뭐야뭐야...

내일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 맘 편하게 봐야지.

< 8월 19일 목요일, 둘째날 공연 >

... 지금 너무 졸려서, 머리가 띵하다. 오늘은 중간쯤에서 봤다. 뭔가 소극장하고 느낌이 다르다. 무대가 한눈에 확 들어오면서 무대 좌우 잡동사니들하고 앞에 관객들이 다 한눈에 들어오는 게 연극이 아니라 무슨 영화 스크린 같다. 배우들과 같이 호흡하는 게 아니라 제 3자가 되어 관찰하는 느낌이랄까. 집중하기가 꽤 힘들다. 배우들 표정도 거의 안 보인다. 어젠 그렇게 잘 보이더니. 이래서 무악극장이 더 좋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그런가? 오늘은 꽤나 지루했다. 관객들 분위기도 좀 이상했고. 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건지 극 자체가 별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제하고는 많이 달랐다.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처음에 조명이 너무 일찍 꺼지고 음악이 안나오는... 잘 기억 안나지만 하여튼 뭔가 암전 중에 이상했던 때가 한 번 있었는데, 극 초반에 그런 일이 생기니까 분위기가 영 암울해졌다는 사실.

그러나 저러나 소품이 떨어지거나 깨지거나 드레스 옷자락이 밟히거나 부채가 망가지거나 컵이 깨지거나 배우들이 미끄러지거나 하는 일들이 하나도 안 일어나서 다행이다. 음음...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 대사를 버벅대서 감이 확 깨진 적은 있었구나. 그정도야 뭐 (난 그보다 훨씬 더 연기를 못할테니 -_-)

좋은 일만 생각해야지. 마지막에 그 숨막히는 분위기는 잊겠어. 분장 처음엔 정말 힘들더니 요즘은 드디어 조금 감이 잡힌다. 난 차라리 턱 깎고 코 높이고 주름 그리는 게 더 쉽다. 아이라인하고 눈썹 그리는 거 만큼 세상에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ㅠ_ㅠ 평소에 화장을 하고 다녔더라면 잘 할 텐데, 아직 화장을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는 아니고, 게을러서 안하고 다니니 정말 낯설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리는 거지?

마지막날 내가 포켓에 들어가서 분장 고친다. 잘해야지.

< 8월 20일 금요일, 셋째날 공연 >

민경이랑 같이 분장 고침.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많이 긴장했는데, 막상 마지막에 얼린 부인 머리 올린거 풀고 모자 씌워줄 때 빼곤 할만했음... 이게 탈 때는 쫄쫄 타다가 (시간 내에 못끝낼까봐;;) 막상 할 일 없을 때는 무지무지하게 지루하다. 희진언니가 심심할 때 먹으라고 음료수 사주셔서 고마웠다. ^-^ 런스루 비슷한 리허설부터 어제 그제 공연까지 계속 봐 와서 이젠 대사를 다 외울 지경이다. 지금쯤 어떤 배우가 무대의 어느 부분에서 어떤 동작을 하고 있겠구나... 어 이 대사에선 사람들이 웃어야 하는데 왜 안 웃지? 등등 . 계속 배우들 대사를 바꿔서 웅얼거리면서 지루함을 달래본다. "이 세상에는 오직 두가지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하네. 첫째는 포켓 밖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사람들이지. 둘째는 첫째보다 더 큰 비극인데, 포켓 안에서 분장을 고치는 사람들이야. 이게 진짜 비극이라구." --:

대사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는데... 말해놓고 보니 분장이 꽤나 안 좋은 일 같이 들리는군... 아냐아냐. 얼마나 재밌는데 *^^* 다만 똑같은 걸 계속 보는 게 지루하다는 거다... 그거야 내 사정이고, 공연 자체는 정말 재밌었다. 관객들도 계속 웃으면서 재밌게 즐겼고, 배우들도 행복해 보여서 좋았고...

공연 끝나고 꾸물대다가 대현오빠에게 디렉션 받을 타이밍을 놓쳐서 배우들 디렉션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여튼 게을러가지구 -0- 그치만 덕분에 스텝들 뒷풀이에 말려서 재밌게 놀았다 ^0^ 좋은 병맥집을 동률오빠 덕분에 발굴해냈고, 처음 시도해봤던 바카디 오렌지도 맛있었고, 노래방에서 인수의 노래를 듣는 것도 역시 오랜만이었다. 하하. 사진 올려야 하는데 벌써 일 가야 할 시간이네...

< 8월 21일 토요일, 넷째날 공연 >

나라하고 나라 남친이 공연 보러 왔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어서 더 안타까웠다. 같이 볼 수 있었는데...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반가웠다. 근데 공연 시작 전엔 내가 포켓 들어가느라 5분도 못 만나고, 공연 끝나서는 나라가 바빠서 얼굴도 못 봤다. 이게 머야 -_-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얼린 부인 머리 올리려고 보니 머리핀이 하나 없는거다!!! 왕 당황했다;; 급한대로 실핀으로 고정을 시켰으나 고정력이 약해 계속 빠져버린다는... 아주 쫄쫄 타면서 세번째만에 성공시켰다. 후아아. 그 머리 올릴 때 쓰는 곱슬머리 가발, 처음에는 예뻤지만 공연을 거듭하면서 점점 부시시해졌다. 그거 진주핀으로 다듬는거도 어제보다 어렵고... 아주 활활 타서 재만 남는 거 같은 느낌이었다. 얼린부인 나가서 연기하는 동안 난 그 머리가 풀리지나 않을까 머리에 꽃은 꽃이 떨어지진 않을까 아주 노심초사해서 죽는 줄 알았다. 보이지도 않고 목소리만 들리니 원; 포켓 안에서도 하나도 안 지루하더라 -0- 정작 포켓 나와서 물어보니 이 날 머리가 공연 중에 젤 괜찮았다고 했다. 다행다행다행. 아아. 이렇게 쫄쫄 탈 바엔 실시간 스텝과 다를 게 뭐냔 말이다.

나중에 머리 내리고 모자 씌우면서도 시간이 빠듯해서 가발 고정시킨 실핀 하나하나 뺄 사이도 없이 그냥 막 가발 잡아당겨서 빼서 바닥에 내팽개치고- 난 아플까봐 차마 못하고 있었는데 민정언니가 해주셨다. 언니 고맙습니다 ^-^ - 급하게 모자를 씌우고 얼굴을 조금 고치고 나서 얼린부인 무대에 등장. 역시 난 포켓에서 쫄쫄 탐. "미안하다 얘야,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라고 하면서 고개 숙이는데 모자가 탁 떨어지면 어쩌겠어. 누구 말처럼 어린 마가렛이 "어 아줌마 이것도 선물로 주시는 거에요?" 하면서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수 밖에 -_-;;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항상 마지막 공연이 젤 좋은 거 같다. 아쉬움도 크고. 끝나고 나서 캐스트들 울면서 서로 껴안는 거 보는 거도 좋고... 비록 배우는 아니었지만, 포켓 안에 있으니 작년 여름 이 곳에서 느꼈던 기분을 약간은 떠올릴 수 있었다. 다들 죄수복 입고, 한 줄로 서서 음악에 맞춰 걸어나가면서 군무를 추고... 짐보퉁이를 껴안고... 끝날 때 내가 울기 시작해서 포켓 안에서 다들 울고, 여름언니도 울고. ^^; 실시간 스텝들은 그런 걸 더 많이 느꼈나보다. 키 큐들이랑 이야기하는데 다들 담에 캐스트를 할까 말까 고민중이라고. 나도 고민중.

뒷풀이. 스텝 선물을 두 개나 받아서 기분 좋아짐 ^0^ 첨에 하나 받았었는데 익현선배가 하나 더 주셨다. 게다가 누군가가-주환이던가 창익이던가-자기 선물을 나에게 주는 바람에 핸드폰 인형이 무려 세 개! 난 인형같은거 좋아해서 절대 사양 안하지 ^-^

아아. 이번 공연이 벌써 세란극회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져버리다니. 도저히 실감할 수 없어.

2005/11/15 18:05 2005/11/1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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